미국 하원은 24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비시민권자에게 지방선거 투표권을 부여한 지역 법률을 무효화하는 결의안을 266대 148이라는 압도적 표차로 가결시켰다. 특히 56명의 민주당 의원이 찬성표를 던지며 초당적 지지가 이루어졌고, 단 한 명의 민주당 의원만이 ‘출석(present)’ 표로 입장을 유보했다.
이 법안을 주도한 오거스트 플루거(August Pfluger, 텍사스 공화당 의원)는 투표 후 성명에서 “투표권은 미국 시민에게만 주어져야 할 신성한 권리”라며 “이 조치는 미국 선거 시스템의 무결성과 신뢰를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비시민권자의 지방선거 참여는 국가 정체성과 시민권의 의미를 훼손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워싱턴D.C. 자치권 vs. 연방의 권한
이번 조치는 단순한 선거법을 넘어서 워싱턴D.C.의 자치권과 연방정부의 권한 충돌이라는 더 큰 맥락 속에서 해석되고 있다. 워싱턴D.C.는 연방 정부의 직할 구역으로, 독자적인 시의회와 시장이 있지만 의회가 지역 법률을 뒤집을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이 같은 권한은 미국 헌법 제1조 제8절에 따라 부여된 것이다.
앞서 워싱턴D.C. 시의회는 2022년 영주권자나 비이민 비자 소지자 등 비시민권자에게도 지방선거(예: 교육위원회·시장·시의회)에서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이 법은 2024년부터 적용될 예정이었으나 이번 연방 하원의 결의로 제동이 걸린 셈이다.
초당적 반응, 민주당 내 분열 신호?
공화당 측은 이번 결의안을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특히 불법 이민 및 선거 개입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강조했다. 하지만 더욱 주목받은 것은 민주당 내 56명의 의원이 공화당과 뜻을 함께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순한 정당 노선을 넘어서 국가적 정체성과 시민권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정치 전문가인 제니퍼 매칼런 박사(조지워싱턴대 정치학 교수)는 “민주당 내 일부 중도 성향 의원들이 다가오는 선거를 의식해 유권자 다수의 보편적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는 당내 정체성 갈등과 선거 전략 재정비의 신호일 수 있다”고 해석했다.
반면 워싱턴D.C. 시정부와 진보 성향의 의원들은 “이 같은 연방 개입은 지역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프랭크 로렌스(민주당, 뉴욕)는 “D.C. 주민들은 연방 하원의원에게 투표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도, 지역 선거마저 외부 개입에 흔들리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며 자치권 침해 문제를 제기했다.
시정부 관계자는 “영주권자 등 지역사회에 세금과 노동으로 기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지역대표를 선출할 권리를 갖는 것은 민주주의의 확장”이라고 주장했다.
이 결의는 단순히 지역 법률을 무효화하는 것을 넘어, 시민권과 투표권의 연계성에 대한 글로벌 논의에 불을 붙였다. 특히, 대한민국 내에서 최근 논란이 된 귀화 중국인의 참정권 문제와 맞물리며, 동아시아권에서도 유사한 고민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번 하원 결의는 상원의 통과와 대통령 서명을 거쳐야 최종 확정된다. 그러나 하원의 강력한 표차와 초당적 지지를 고려할 때 상원 통과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번 결정을 통해 선거권의 경계와 시민권의 의미, 지역 자치의 한계에 대한 전국적 논쟁이 다시금 뜨겁게 달아오를 전망이다.
한국, 귀화 중국인 지방선거 투표권 확대 이후 논란 지속
한국은 2005년부터 외국인이 일정 요건(5년 이상 거주 등)을 충족하면 지방선거 투표권을 부여해왔다. 이후 중국 국적에서 귀화한 다수의 조선족 유권자들이 특정 지역에서 블록화되어 투표권을 행사하면서 실제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친 사례가 보고됐다.
2022년 지방선거를 전후해 인천·경기 일부 지역에서는 중국계 귀화 유권자들이 한 후보를 조직적으로 지지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이로 인해 시민사회와 정치권에서는 “참정권을 무기로 조직적 선거 개입이 가능하다”는 우려가 급증했다.
2024년 국정감사에서는 귀화자 중 90% 이상이 단일 국가(중국) 출신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며, 편중된 귀화 현상이 특정 정치 세력이나 외교 사안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구조적 문제점이 제기됐다.
이와 관련해 전직 고위 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는 “외국인의 지방선거 투표권 부여는 순수한 자치참여 취지였지만, 지금은 제도의 악용 가능성과 국가 정체성 약화 문제가 현실화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선거권은 ‘시민권의 최후 보루’… 전 세계적 기준 재검토 필요성 대두
미국과 한국 모두 이민·귀화 인구가 급증하는 가운데, 선거권의 문을 어디까지 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서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 특히 국가 안보와 선거 조작 우려, 사회 통합 문제까지 얽혀 복합적 논의가 필요한 상황이다.
미 하원의 이번 조치는 D.C. 자치권과 연방의 권한 충돌이라는 구조적 맥락 속에서도, 근본적으로는 “누가 한 국가의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시민권의 본질적 질문을 다시 제기한 것으로 해석된다.
정치학자 조성환 박사(경기대 명예교수)는 “한국은 미국보다 먼저 지방선거 투표권을 외국인에게 부여했지만, 관리 시스템과 귀화자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다”며 “이번 미국 하원의 결정을 계기로, 한국도 참정권의 범위와 요건에 대한 정밀한 재검토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선거는 권리이자 책임… 정체성과 무결성 동시 보호해야”
미국의 이번 하원 결의는 상원의 통과와 대통령 서명을 거쳐야 최종 발효되지만, 초당적 흐름과 여론을 고려할 때 법제화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반면 한국에서는 아직 외국인 선거권에 대한 전면 재검토 움직임은 미약하다.
그러나 양국 사례는 공통적으로 “선거는 단순한 권리가 아니라, 국가 정체성과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짓는 행위”라는 하나의 메시지를 던진다.
이제는 국제 사회 전체가 참정권의 경계와 요건, 시민권의 의미, 선거의 공정성과 무결성을 동시에 고려하는 정교한 제도적 정비에 나서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