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사실상 ‘준(準)계엄령’에 해당하는 주방위군을 워싱턴DC·시카고·로스앤젤레스 등 주요 도시에 투입하면서 미국은 다시 긴장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미국의 사법 시스템은 이 문제를 ‘법적 논란’으로 다루되, 결코 ‘정치적 숙청’으로 몰고 가지 않았다. 반면 한국의 사법 시스템은 헌법상 계엄 선포권을 가진 대통령의 ‘12.3 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며 사실상 사법 쿠데타에 가까운 절차를 밟고 있다.
이 두 장면은 민주주의가 권력의 폭주를 견제하는 방식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준다.
미국은 ‘대통령의 권한 남용’이라는 문제를 법적 통제와 절차로 다루고 있고, 한국은 ‘정치적 응징’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집권 이후 미국 내 치안 불안과 불법 이민을 이유로 주방위군을 곳곳에 투입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주방위군 투입 사례

워싱턴DC에는 800명, 시카고에는 300명, 로스앤젤레스·멤피스 등 민주당 주도의 대도시에도 수백 명이 투입됐다. 표면상 이유는 “연방 공무원 보호와 범죄 예방, 불법 이민자 단속”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반(反)트럼프 도시’로 불리는 민주당 장악 지자체들을 겨냥한 정치적 군사 행동이었다.
특히 시카고에서는 국경순찰대가 이민 단속 과정에서 시민권자 여성에게 총격을 가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태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즉각 주방위군 투입을 승인했다. 주지사 동의 없이 사실상 연방 정부가 지방의 경찰권을 장악하는 셈이었다.
워싱턴DC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범죄율이 30년 만에 최저를 기록하고 있음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통계가 조작됐다”며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을 투입했다.
그럼에도 미국 사회는 ‘계엄령’이라는 단어조차 꺼내지 않았다. 대신 연방 법원이 ‘헌법상 대통령 권한의 한계’를 따지며 제동을 걸었다.
7일(현지시간) 미국 제9연방항소법원은 트럼프 행정부가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주방위군을 배치하는 것은 위헌이라며 “영구적으로 투입 금지(permanently ban)”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대통령이 주방위군을 연방화할 합법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며 “군대 없이는 통제할 수 없는 폭동이나 반란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명시했다. 즉, 트럼프 대통령의 조치는 ‘권한 남용’이었지만, 그에 대한 대응은 법정에서의 헌법적 통제였다.

이 점이 한국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의 ‘계엄적 조치’가 불법으로 판단되더라도, 그것은 헌법 질서 내에서 ‘무효’로 제동이 걸릴 뿐, 대통령이 ‘내란범’으로 처벌되지는 않는다.
헌법상 계엄 선포권이 대통령에게 부여돼 있다는 기본 전제가 지켜지기 때문이다.
법원은 ‘정치적 판단’을 대신하지 않으며, 대통령의 권한 남용을 ‘형사범죄’로 해석하지 않는다.
한국의 현실은 정반대다. 2023년 12월, 윤석열정부가 ‘12.3 계엄’를 선포했다는 이유로 사실상 군 관계자 증언을 근거로 ‘내란’ 혐의를 적용받았다.
헌법 제77조는 “대통령은 내란이나 외환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음에도, 한국의 검찰과 법원은 이를 ‘내란’으로 몰아가고 있다.
결국 헌법상 부여된 권한이 ‘범죄 행위’로 전환된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법치 원칙’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법치주의란 ‘모든 권력 행위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원리다. 그러나 한국의 사법 시스템은 대통령의 헌법상 행위를 정치적 의도로 재단하고, 이를 형사적 책임으로 치환했다.
이는 단순한 사법 판단을 넘어선 ‘정치적 사법화(Judicial Politicization)’의 극단적 사례로 평가된다.
트럼프 행정부의 군 투입은 분명 위험한 조치다. 주지사 동의 없는 주방위군 배치는 연방주의 원리를 훼손하고, 정치적 목적에 군을 이용하는 행위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응은 헌법 체계 안에서 이뤄진다. 법원이 대통령의 권한 남용을 제한하면서도, ‘민주적 질서’를 유지하는 이유는 대통령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은 “대통령을 법으로 제어하되, 정치로 심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반면 한국은 ‘대통령을 정치로 심판하고, 법은 그 도구로 사용한다.’ 그 결과, 법정이 정권 교체의 연장선이 되고, 헌법은 권력 투쟁의 무기로 전락한다.
미국의 연방항소법원이 트럼프의 주방위군 투입을 ‘위헌’으로 판단했지만, 대통령의 자유와 직무권은 그대로 보장됐다. 법원이 “대통령의 결의에 큰 존경을 표한다”는 문장을 판결문에 명시한 것은 상징적이다. 권한 남용을 지적하되, 대통령이라는 헌정기관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태도다.
그러나 한국의 사법부는 대통령의 결정을 ‘헌정 질서 파괴’로 단정하고, 국가기관의 정당한 판단을 형사적 단죄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차이는 단순히 법률 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가 법을 통해 권력을 제어하느냐, 권력으로 법을 제어하느냐의 문제다.
워싱턴과 서울의 차이는 ‘법치주의의 품격’이다. 미국은 대통령의 계엄적 조치를 법원에서 다투며 헌정 질서를 지킨다. 한국은 헌정 질서 그 자체를 사법의 이름으로 무너뜨린다.
트럼프는 법의 제동을 받았지만, 정치의 복수는 받지 않았다. 윤석열은 헌법의 권한을 행사했지만, 정치의 법정에서 죄인이 됐다. 그 차이는 바로 “법이 권력을 다루는 방식의 품격”이다.
법은 권력의 주인이 아니다. 법은 권력을 감시하고, 통제하며, 때로는 지켜주는 울타리여야 한다.
트럼프의 ‘군 동원’은 분명 논란이지만, 미국의 법은 그 논란조차 제도 속에 품었다.
한국의 사법은 권력을 제압하기 위해 법을 들이대며, 스스로 헌법 위에 올라섰다.
이제 질문은 분명하다.
“누가 더 위험한가. 군을 동원한 대통령인가, 헌법 위에 선 법원인가.”
미국은 첫 번째를 제어했고, 한국은 두 번째를 선택했다.
결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대통령의 계엄이 아니라, 사법의 오만과 불법에서 비롯된다.

작가·언론인
세계일보 기자·문화부장·논설위원
한국통일신문·시사통일신문 편집국장·대표
스카이데일리 논설주간·발행인·편집인·대표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