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지도자 연쇄 구속과 압박,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 자유의 방어선이 무너질 때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동조다
전광훈 목사가 구속됐다.
그에 앞서 손현보는 장기간 사법적 압박의 대상이 되었고, 특정 종교 지도자와 단체를 향한 공권력의 잣대는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전례 없는 흐름 앞에서 한국 교계와 시민 사회는 놀라울 만큼 조용하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단순한 개인 사건이 아니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해 온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인신의 자유가 어디까지 후퇴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과정이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 시험의 기준선은 더 낮아진다.
동의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해서 외면하고 있는가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전광훈 목사와 생각이 다르다.”
“목사가 정치에 나섰으니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이 논리는 매우 위험하다.
법치가 무너질 때 권력은 가장 먼저 가장 시끄럽고, 가장 고립된 목소리를 제거한다.
그 과정에서 동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선례다.
구속은 어디까지나 도주 우려나 증거 인멸 가능성이라는 예외적 요건에 한정되어야 한다.
사상, 발언, 사회적 영향력 그 자체는 결코 구속 사유가 될 수 없다. 이 원칙이 흔들리는 순간, 오늘은 그가 대상이지만 내일은 누구든 대상이 된다.
오늘 SNS에 올린 비판 한 줄,
교회 안의 작은 기도 모임,
정책을 향한 공개적인 문제 제기 역시
언제든 ‘문제적 행위’로 재분류될 수 있다.
마르틴 니묄러의 경고는 과거가 아니다
나치 정권 시절, 침묵의 대가를 고백했던 니묄러의 경고는 지금 이 사회에 그대로 적용된다.
> “그들이 처음 전광훈 목사를 잡아갔을 때,
> 나는 침묵했다. 나는 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그들이 손현보 목사를 압박했을 때도,
> 나는 침묵했다. 나는 그 교회의 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마침내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 나를 위해 말해 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사법권이 자의적으로 확장될 때 자유는 항상 이런 방식으로 사라져 왔다.
침묵하는 교계는 스스로 ‘관리 대상’이 되기를 선택하고 있다
지금 한국 교계의 다수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
불똥이 튈까 두렵고, 세속적 비난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가 권력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순간, 종교는 더 이상 초월적 진리를 말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행정의 관리 대상이 되고, 정치의 조정 대상이 된다.
한학자를 비롯해 여러 종교계 인사들이 사법의 도마 위에 오르는 현상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특정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 권위 자체를 세속 권력 아래 두려는 구조적 흐름이다.
오늘 침묵하는 교계는
내일 국가가 허락한 범위 안에서만 설교하고,
허가된 주제만 말하며,
허용된 신앙만 유지하는 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용기 있는 선 긋기’다
자유민주주의는 법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부당한 권력 행사 앞에서 “아니다”라고 말하는 시민의 용기 속에 살아 있다.
이번 전광훈 목사 구속 사태는 한 인물의 호불호를 가리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대한민국에서 자유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를 묻는 시험대다.
오늘 침묵한다면,
내일 돌아올 것은 판결문이 아니라
사법의 공포 언어일 가능성이 크다.
내일은 당신 차례일 수 있다.
아니, 이미 자유는 조금씩 시작되고 있다.
지금 말하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말할 자격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